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이소 구니아키 (문단 편집) === 총리 고이소 === || [[파일:external/www.kantei.go.jp/souri41.jpg|width=100%]] || || 41대 총리 취임 후 || 1944년 사이판의 함락으로 [[도조 히데키|도조 내각]]이 퇴진하고 후임 총리로 데라우치 히사이치 남방총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지나(China의 일본식 발음)파견군 사령관, 고이소 이렇게 세사람이 물망에 오르게 된다. 데라우치는 최전선 사령관이니 지금 불러들이기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장 적합한 후보라는 의견이 대세였음에도 기각되었고 하타 슌로쿠는 중신들이 대부분 반대하여 결국 [[히라누마 기이치로]]와 [[요나이 미쓰마사]]의 추천을 받은, 가장 무난하고 힘도 없는 고이소가 총리에 오르게 된다. 고이소는 육군대신 겸직과 현역 육군대장 복직을 요청했으나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대장에게 단칼에 거절당했고 육군성 시무국장 사토 겐료 중장으로부터 2달이면 무너질 것이라는 조롱을 듣는다. 고이소는 [[미군]]에게 일격을 가해 그 기회를 노려 대미 강화에 나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육군 지휘부는 고이소의 의향을 따르지 않았고 최고전쟁 지도회의에서 고이소는 발언시 하타 히코사부로(秦彦三郞)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근대적 작전용병을 모르는 수상은 발언할 자격도 없다"라는 수모를 당했다. 육군성 내부에선 "이 내각은 2달 밖에 갈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 이유는 구니아키가 육군의 엘리트가 아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육군대학에서 졸업 했을 때 성적은 55명 중에 33등이였는데다가, 20등 이하의 성적을 가지고 출세한 자는 고이소 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육군은 육사와 육군 대학 시절의 성적이 이후의 출세를 결정 짓는 오늘날 시각으로는 황당한 전통이 있었다. 단, 고이소 뿐이라는 말은 대장급 한정이다. 중장의 경우에는 몇명 더 있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라던가, 일본 최악의 졸장인 [[도미나가 교지]]가 그 예.]. 그래서 고이소는 다른 육군의 엘리트들에게 젊었을 적부터 무시당했고 이로 인해 어느 파벌에 끼어들지 못하게 되어서 육군 내부에 그의 편이 되어줄 강력한 파벌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이소가 승진을 한 이유도 분명했다. 고이소는 엘리트를 제외한 육군 내부에서 이상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유연하다는 평도 들었는데, [[1930년]] 군무국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성적과 달리 의외로 실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을 씹고 뜯고 맛본 다음에 논리적이고 표현력이 좋게 연설하는게 특기였다고. 군무국장, 총독, 나아가 총리라는 어려운 자리를 버텨낸 건 그런 능력이었다. 어쩌면 인간승리. 하지만 후에서 보듯이 의외라는 정도지 임기응변 이상의 능력은 없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Koiso_cabinet_photo_op.jpg]] || || 고이소 내각 || 1944년 10월, [[사이판 전투|사이판 함락]]을 구실로 사임한 [[도조 히데키]]의 뒤를 이어 총리에 발탁되었다. 예비역이 된 후 조선 총독을 하는 등 오랫동안 군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임명된 까닭이었다. 도조 히데키가 퇴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마지막까지 밀어붙인 [[스기야마 하지메]]의 육군대신 임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등, 본인도 육군대장 출신이면서 육군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육해군 모두에게 무시당하고 전과 보고도 제대로 받지 못해 전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히로히토]]가 무어라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패배를 듣고 고이소는 디시 현역 육군대장 복귀와 육군대신을 겸직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도 육군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해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참고로 고이소는 도조보다 선배였다. 그러나 고이소는 본인 이외에 육군에 동료 장성이 없었기에, 즉 자기 파벌이 없었기에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핵심 인물들에게 무시당한 것이다.] || [[파일:970px-Koiso2.jpg|width=350]] || || [[1945년]]의 고이소 구니아키 || 그는 [[도조 히데키|도조]]의 무능한 정책을 이어갔으며, [[카미카제]]의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자폭기에 장갑을 덧대는 등 [[삽질]]은 계속 되었다. 고작 9개월의 집권 기간 동안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손발이 안 맞아 해군은 해군대로 패전하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육군과 해군의 알력싸움으로 골만 깊어지는 등]], 되는 일이 없었다. 각 일본 육군이나 해군 내각에서도 유우부단한 고이소에 대해서 그의 능력에 대해 불신했기 때문에 전쟁을 지휘하는 지도자로는 맞지 않았다. 이런 [[삽질]]은 동맹국인 [[나치 독일]]에까지 전해져, [[나치 독일]]의 총리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고이소 내각은 전쟁을 수행할 힘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일본 제국|일본]]이 [[나치 독일|독일]]보다 먼저 항복하면 [[나치 독일|독일]]이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고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독일이 3달 먼저 망했다.-- ~~그래도 5월에 망했으니 최소한 구니아키 퇴임 이후였다.~~ 고이소 내각이 무너진 결정적 원인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을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해서 그를 축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 고이소는 중일전쟁을 밀사를 통해 해결보려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어 시게미쓰의 협상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고이소의 막장 운영에 지친 귀족 원로들과, 해군 출신 원로들의 연합탄핵으로 총리직에서 쫓겨나는 운명을 당했다. 이로서 고이소 내각은 1945년 4월 7일 무너져 겨우 8개월짜리의 단명 내각이 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